필자가 친했던 예언가(豫言家)-도사(道士) 한 분이 이 세상을 떴다. 이 세상에서의 예언이 부족해, 저 세상의 예언을 하러 서둘러 떠났다.
조선일보는 12월4일자 “'예언자' 차길진 법사 별세”제하의 차길진 법사의 사망기사에서 “차길진 후암미래연구소 대표가 3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전북 전주 출신인 고인은 독립운동가이자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던 경찰관 차일혁(총경)의 아들이다. 종교인, 극작가, 스포츠인으로 활동했으며, 1986년 설립한 후암정사의 회주(법사·法師)를 맡아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예언과 망자의 영혼을 불러와 한을 풀어준다는 구명시식으로 유명했다”고 전하면서 “2002년에는 월드컵 4강 진출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당선을 한 해 전에 예측했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4년 미국 뉴욕에서 9·11테러 희생자 진혼식, 2005년 일본 삿포로에서 한국인 징용 희생자를 위한 진혼식을 열었다. 후암문화공간 대표, 한국불교신문 사장, 우리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영혼의 목소리' '효자동 1번지' 등의 책을 냈다”고 소개했다.
필자는 고(故) 차법사와 긴 기간 교유했다. 1989년, 처음 만났었다.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5년 동안 반정부 기자를 하다가 귀국한 해였다. 언론통제가 없었던 미국 뉴욕에서 활동했던 전력 때문에 거침없이 비판의 글을 쓰던 시절이었다.
당시, 토요신문 창간호 톱기사로 박태준 포스코 회장(민정당 대표)을 까는(양해바람. 기자세계 은어) 기사를 실었다. 포스코 회장+민정당 대표였으니 권력(勸力)과 금력(金力)을 쥔 파워맨이었다. 7주 정도 시리즈로 그에 대한 이런저런 글을 실었다. 아마, 그런 비판성 기사라서인지 주변에서 필자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필자는 박태준 회장의 비판 기사와 관련, 혹시 고소를 당하거나 구속될지도 모른다며 내심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차길진 법사가 나에게 나타났다. 그때 차 법사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예언력을 자랑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나, 혹시 박태준 회장 비판 기사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이때 차 법사는 ”내가 기사를 쯤 읽어보았는데 그럴 일이 없어. 포스코 회장에서 성공, 민정당 대표로까지 온 거물급 정치인인데 그 정도 비판을 감수하지 못하면 그 자리를 못 지킬 거야. 그 기사 때문에, 오히려 그 분이 위대하게 보여질 거야. 비판이 없는 한국 신문들, 당신 기사가 경종을 올려줬어, 안심해, 안심해...“라고 말했다.
“아니 날 위로해달라는 게 아니고, 차 도사님 예언력으로 어찌되는지를 말해주세요”
잠시 시간이 필요했는지 침묵했다. 그는 이윽고 입은 열었다.
“나 영혼에게 물어보니 ‘아무 일이 없을 거야라고 답했어’라고 말했다. 당신, 앞으로 승승장구한다고 그러네”
그 사건 이후, 내가 근무했던 일간신문(세계일보)을 떠나긴 했어도, 그 기사 건으로 감방에는 가지 않았다. 박태준 포스코 회장도 국무총리까지 승승장구 했다. 대통령만 못했다. 돌이켜보건데, 이 땅이 낳은 큰 분이다. 차 도사의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그 무렵, 차 도사는 그의 부친인 차일혁(6.25 직후 빨치산 토벌대장) 총경의 수기 집 출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필자는 그 수기집의 서문쓰기를 도와줬다.
조선일보 보도는 그의 사망기사에서 “후암문화공간 대표, 한국불교신문 사장, 우리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신문이 언급한 대로, 그런 일들을 하면서 많은 족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저런, 굵직한 예언을 하며 살았다. 세상과 사람들을 쥐락펴락했다.
필자는 세상에 나와서 진짜 형님이 아닌 분에게 ‘형님’이라 호칭한 사람은 한분도 없었다. 왜냐? 나의 친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형이 사망한 이후, 차 법사를 항상 ‘도사 형님’이라고 불렀다. 세상의, 첫 형님인 것이다. 그 이후, 개인적으로는 차 법사를 만나면 항상 ‘도사 형님’이라고 호칭했다.
필자는 며칠 전 꿈을 꿨다. 홍수가 나서 급류가 흐르는 강에서 수영을 했다. 3명이 있었다. 나는 급류의 핵 부분에는 가지 않았다. 헤엄쳐 나왔다. 이때 한명이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다. 나머지 한명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꿈 이야기를 회사의 회의 시간에 발설했다. 나와 친한 한 명이 사망하는 꿈이라고. 그런데 이 꿈의 현실화가 이뤄졌다. 차 도사 형님이 사망한 것이다. 그는 홍수 난 세상에서 자유롭게 유영(遊泳)하다가 급류의 핵 속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한명은 세상에 살던 차 도사를 지켜주었던 보호령(保護靈)이었지 모른다. 그 영(靈)이 차 도사를 끝까지 잘 보살펴줬다. 내 꿈이 맞았다. 그가 나에게 예시했을 수도 있다. 죽음을 미리 나에게 알린 것이다.
나와 차 도사는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남북한이 자유왕래 하는 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모스코바와 파리를 가보기로 했다. 돈은 형님인 자기가 낸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으로 이 예언과 약속은 영원한 미해결로 남게 됐다. “차 도사 형님, 저 세상에서도 한반도의 길운(吉運), 좋은 운명을 예언하면서 영면하소서!” moonilsuk@naver.com
*필자/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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